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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속에 묻힌 지명 발굴… 조상들 삶과 마주하다

용인의 문화예술인 19. ‘땅 이름 연구 전문가’ 정양화 선생

 

 

대학 졸업후 1980년부터 땅이름 연구 본격화
30대 초반 젊은 나이에 문화원 이사직 열정
용인 난개발, 지명과 함께 역사·전설도 사라져
직접 마을 구석구석 누비며 고유 이름 되찾기

 

[용인신문] 요즘의 행정구역 이름은 참으로 무미건조하다. 그러나 옛 지명은 멋스럽고 기발하다.

 

우리조상들은 평지에 우뚝하게 서 있는 봉우리(뫼)가 있는 곳이라고 해서 ‘딴미’라고 불렀다. 따로 떨어져 있는 산이라서 불여진 이름이다. 자연스럽고 소박한 게 대부분 이런식이다.

 

용인의 땅이름 연구에 독보적 존재인 정양화 용인문화원 부원장(66‧전 용인향토문화연구소 소장)은 지금까지 40여년간 땅이름을 조사 연구하고 정리했다. 그의 저서 ‘용인의 땅이름 1, 2’에는 지금은 잊혀진 옛 땅이름부터 땅이름의 유래 등이 잘 기록돼 있다.

 

옛 지명은 우리말의 보고임은 물론 언어적 묘미, 옛 지명에 얽힌 역사와 전설, 지형에 이르기까지 용인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기록이다.

 

“모든 지명에는 용인의 역사와 조상들의 생활, 조상들이 살았던 흔적이 스며있죠. 용인이라는 이름은 멸오에서 용구를 거쳐 용인이 됐잖아요. 그 속에는 삼국시대부터 현재에 이어지는 용인의 역사가 있는 거에요. 풍속, 종교, 교통, 풍수 등과 관련한 땅 이름도 많아요. 당집이나 서낭댕이, 부처바위는 종교나 풍속과 관련된 것이고, 사기점이나 무쇠점터, 숯구뎅이 같은 이름은 조상들의 생활과 관련돼 생겨났죠.”

 

그러나 이처럼 유서 깊고 아름다운 우리말 지명들이 개발의 미명하에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리는 어처구니없는 경우가 발생한다.

 

“용인이 난개발 하면서 어떤 면에서는 천지개벽했지만 단순히 지명만 없어진 게 아니에요. 거기 살던 사람들이 일군 역사, 전설, 그때 살던 효부, 열녀, 그리고 충신도 낙향해 살았을 수 있고, 거기서 어떤 획기적인 역사적 사건이 있었을 수 있는데 그런게 싹 사라진 거에요.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다 없어지는 거에요.”

 

수지구나 기흥구처럼 전통마을이 한꺼번에 사라지면서 고유 지명도 함께 사라져버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논밭이 대로로 바뀌고, 아파트숲으로 변한데다 그 땅에 살던 사람들까지도 거의가 바뀌면서 예전에 불리던 지명과 얽힌 이야기를 도무지 알아낼 길이 없어지고 만다.

 

물론 땅 이름에는 생명이 있어서 새로운 도로나 건물에 현대적인 이름이 새살처럼 생겨나지만 옛 우리말이 사라져버리는 치명적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땅 이름과 관련해 무엇보다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은 우리말의 보고라는 점이에요. 특히 지금은 사라진 옛 말이 땅 이름에는 많이 남아 있거든요. 그 가운데 한자로 표기돼 원형이 변화된 것도 있지만 뿌리를 소급해 보면 결국 우리말로 이어져요. 따라서 땅 이름 연구는 사라진 우리 옛말을 되살리는 일이라고 할 수 있어요. 땅이름 연구가 중요하고 필요한 이유죠.”

 

아주 오래된 지명이 100년, 200년 전에 새롭게 바뀐 경우도 있고, 그 당시 아예 새롭게 생겨난 이름도 있다. 당장 사라지고 생겨나는 게 아쉽고 생경한 듯 하지만 그 역시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는 옛 지명이 되는 것이니 사라지고 생겨나는 순환이 어쩌면 자연의 이치와도 같이 자연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성당터나 신부고개와 같은 지명도 있어요. 이는 천주교 전래 역사가 200여년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땅 이름 역사도 200년을 넘지 않는 게 분명하지 않겠어요.”

 

정 부원장은 용인은 땅 이름의 보고라고 한다.

 

“위치나 지형적으로도 많은 지명이 생겨날 수 있는 여건을 가지고 있어요. 산이 없고 들이 넓은 곳에는 땅이름이 많지 않거든요. 또 산이 많은 곳에는 산봉우리나 골짜기 이외에는 땅이름이 다양하지 않아요. 그러나 용인은 산도 많고 들도 적당히 발달돼 있어서 산악지형과 평야지형에서 볼 수 있는 땅이름을 고루 찾아볼 수 있어요.”

 

뿐만 아니라 용인은 한강 이남에 치우쳐 있다 보니 예로부터 삼남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적어도 고려와 조선의 1000년 동안 개경이나 한양으로 올라가는 주요 교통로였다. 자연히 땅 이름 하나라도 더 생길 수 있는 여건이 기본적으로 갖춰져 있던 셈이다.

 

정 부원장이 땅이름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부터다. 단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용인상업고등학교 국사교사로 재직 중이던 그를 용인문화원 원장을 비롯한 지역 어른들이 불러내 용구문화 책자에 땅이름을 게재하라고 했다.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던 그는 문화원 이사직까지 맡게 됐다.

 

모현면 출신인 그는 어렸을 때부터 유교적 가풍 속에서 성장했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후손으로 중학교 때부터 축문을 썼다. 부친은 모현농협 초대, 2대 조합장을 지내고 인삼조합조합장도 지낸 정운영 선생이다. 1960년대 당시 모현에서 돈을 내고 신문을 구독하는 유일한 집이었다. 그는 한자 실력도 출중했고, 여러모로 향토사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현재 충렬서원 총무와 심곡서원 부원장을 지내는 등 용인의 유림 일을 맡아 하고 있다. 한시에도 능해 전국한시대회 장원을 비롯, 경복궁에서 매년 가을에 열리는 조선조 과거재현 대회에서 갑을병과 총 33명을 뽑는 가운데 병과에 네 번이나 급제했다.

 

“을과도 못갔는데요. 경복궁의 대회는 운자가 뭐가 나올지 모르고 두 시간 안에 지어내야 해서 힘들어요. 시제는 주는데 운자는 안줘요. 당일 날 뽑아 거기서 제시해요.”

 

정 부원장은 무엇보다 지명조사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내가 생각할 때 지금까지 조사한 게 1/10, 1/100이나 될까. 속지명 따지면 어마어마하게 많죠. 보통 행정적으로 부르는 무슨 리 같은 지명 말고, 동네 가면 무슨 골짜기, 어디께 등을 보통 속지명이라고 애기하는 데 그걸 다 따지고 밝히려면 무지하게 많은 거죠. 많이 돌아다녔고, 많이 했다고는 보는데 못한 게 더 많다고 봐야죠. 아직도 할 게 많아요.”

 

용인의 읍면지를 10년 정도 집필하면서 용인지역을 거의 다 돌아다녔다. 지명조사를 하기 위해서는 한 동네에서 적어도 이장, 노인회장 등 몇 사람을 만나 물어봐야 한다.

 

“동네를 한바퀴 돌면서 저기 보이는 골까기가 뭐냐, 바위가 있냐 물어보는 거죠. 선행 자료로는 이인영 선생이 쓴 용인지명총람, 조선지지 자료, 옛날 내무부 자료, 한글학회 자료를 기초자료로 했고 배우리 선생의 저서 ‘우리땅이름의 뿌리를 찾아서’를 통해 공부도 했죠.”

 

용인향토사를 이을 젊은이가 없어 걱정이라는 그는 용인의 고개이름, 마을의 산업에 대한 조사도 마쳐 놓은 상태다. 올해는 그간 써놓은 1000여수에 이르는 한시를 추려 한시집을 펴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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