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말 신미나 요새 택배비 얼마나 한다고 저 무거운 걸 지고 다녀 거지같이 누구더러 하는 소린가 했더니 붐비는 사람들 사이로 아버지가 온다 쌀자루를 지고 낮게 온다 거지라니, 불붙은 종이가 얼굴을 확 덮친다 다 지난 일인데 얼굴에 붙은 종이가 떨어지지 않는다 신미나는 1978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났다. 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부레옥잠」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녀는 일러스트레이터이며 카피라이터이기도 하며 웹툰 시집 『시누이』를 출간하기도 했다. 이번 시집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는 일상의 아픈 것들을 주로 노래한다. 목소리는 잔잔하고 조용하다. 죽은 사람들이나 떠나간 사람들이나 잃었거나 앓고 있는 사람들이 자주 나오는 것은 그녀가 보는 세상의 아픈 풍경들 때문이다. 「무거운 말」은 그녀의 시세계의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시 속의 화자는 아마도 그녀 자신을 것이다. 모두들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요새 택배비 얼마나 한다고/ 저 무거운 걸 지고 다녀/ 거지같이’라고 누군가 하는 말이 들렸다. 누구더러 하는 소린가하여 그 말소리가 들리는 뒤를 돌아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붐비는 사람들 사이로 아버지가 오는 것이다. ‘쌀자루를 낮게
세월 곽재구 하얀 민들레 곁에 냉이꽃 냉이꽃 곁에 제비꽃 제비꽃 곁에 산새콩 산새콩 곁에 꽃다지 꽃다지 곁에 바람꽃 소년 하나 언덕에 엎드려 시를 쓰네 천지사방 꽃향기 가득해라 걷다가 시 쓰고 걷다가 밤이 오고 밤은 무지개를 보지 못해 아침과 비를 보내는 것인데 무지개 뜬 초원의 간이역 이슬밭에 엎드려 한 노인이 시를 쓰네 곽재구는 1954년 전남 광주에서 내어났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사평역에서」가 당선되면서 시단에 나왔다. 그는 인간 본래의 사랑과 그리움을 노래해온 서정성 짙은 시세계를 보여준 중견시인이다. 이번 시집 『꽃으로 엮은 방패』는 등단 40주년을 맞아 펴낸 시집으로 맑고 고운 서정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세월」은 그의 자화상이다. 시간의 잔혹성은 영원불변이어서 누구에게나 가혹하다. 언덕에 엎드려 시를 쓰던 소년은 이제, 무지개 뜬 초원의 간이역, 이슬밭에 엎드려 시를 쓰는 노인이 되었다. 언젠가는 하늘에서 은하수에 엎드려 시를 쓰게 될 것을 예감케 한다. 소년의 계절은 봄이어서 민들레, 냉이꽃, 제비꽃, 산새콩, 꽃다지, 바람꽃이 피어 있다. 소년이 봄인 것이다. 노년이라고 해서 어둡지만은 않다. 천지사방에 꽃향기 가득한 봄도 있
강 이산하 모난 돌과 바위에 부딪혀 다치는 것보다 같은 물에 생채기 나는 게 더 두려워 강물은 저토록 돌고 도는 것이다 바다에 처음 닿는 강물의 속살처럼 긴장하며 나는 그토록 아프고 아픈 것이다. 이산하는 1960년 경북 영월에서 태어났다. 1982년 필명 ‘이륭’으로 『시운동』에 연작시 「존재의 놀이」를 선보이면서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87년 3월 25일 발간된 사회과학전문 부정기간행물 ‘녹두서평’ 1집에 제주4․3사건을 다룬 장편서사시 ‘한라산’을 발표하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구속되어 필화를 겪었다. 그의 시세계의 키워드는 자연스럽게 인간, 생명, 자유, 정의, 민주, 평화, 혁명이었다. 김수이는 해설에서 이산하가 재의 시간을 건너왔다고 지적한다. 그의 재의 시간은 불의 시간이었다. 재가 존재하기 위해서 불은 필연적이다. 그는 재로 남은 불의 전쟁에서 완전히 패배했다고 노래한다. 중요한 것은 그의 패배가 한 개인의 패배가 아니라 역사의 패배이며 인간의 패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아프게 폐부를 찌른다. 「강」은 알레고리가 강한 시다. 시인은 회돌이 하는 강물을 보고 있다. 강물의 회돌이는 모난 돌이나 바위에 부딪혀 생기는 생채기
꿈과 난로 정현우 이파리가 가늘게 가지들을 낭독한다 불 꺼진 난로, 은색 주전자, 입김은 사라진다 모든 슬픔을 한꺼번에 울 수는 없나 아, 난 죽은 사람 숨을 거두어가는 일이 새를 데리러 오는 일이 나에게도 일어난 것 정현우는 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첫 시집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가 출간 한 달만에 1만부가 팔렸다. 그는 2006년부터 15년 동안 꾸준히 음악활동을 해온 가수이기도 하다. 2007년 발표한 노래 ‘바람에 너를’로 대형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 1위를 차지하는 등 독특한 이력으로 음악과 문학 양쪽을 활발히 오가고 있다. 그를 오래 기다려온 팬들을 중심으로 한 탄탄한 팬덤이 문학 독자들로까지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세계의 기본 정조는 슬픔이다.「꿈과 난로」 역시 슬픔의 정조가 묻어 있는 작품이다. 화자는 지금 죽음을 맞고 있다. 바람이 조용히 이파리들을 흔드는 날이다. ‘이파리가 가지를 낭독한다’는 표현은 아마도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문으로 쓴 문장일 것이다. ‘불 꺼진 난로, 은색 주전자,/입김은 사라진다’는 둘째 연은 죽음의 객관적 상관물을 제시하는 문장이다. 꺼져가는 생명, 식어가는 체온,
당신들! 블라지미르 마야꼬프스키/석영중 옮김 날이면 날마다 주연에 빠져 사는 당신들 따뜻한 화장실과 욕실을 소유한 당신들! 신문의 칼럼에 난 성 게오르기 훈장의 수훈자들, 그걸 읽으며 부끄럽지도 않은가?! 창자 채울 일만 생각하는 당신들 무능한 오합지졸, 당신들은 아는가? 지금 이 순간 육군 중위 빼뜨로프의 두 다리가 폭탄에 날아갔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처형장에 끌려온 피투성이 군인이 당신들을 보았더라면! 컷틀릿의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입술로 세베랴닌의 음탕한 시나 읊조리는 당신들을. 주색에 빠진 당신들을 위해 내 목숨을 바치라고?! 차라리 선술집 창녀에게 파인애플 주스를 바치련다 블라지미르 마야꼬프스키(1893-1930)는 그루지아 꾸따이스 근처의 바그다지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사망하고 나서 온 가족이 모스끄바로 이주해 상업미술학교 예비반에 입학한다. 이 무렵 볼셰비키 파에 가담해서 학생의 신분으로 세 번의 체포와 구금을 당한다. 그는 1910년대의 러시아 미래주의 혁명예술의 중심인물이 된다. 그리고 볼셰비키혁명 이후 러시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1930년 4월 14일,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당신들!」은 그의 혁명적 기질과 사회적 시각이 잘 드러난
그대가 사랑하게 될 때..... 루벤 다리오/김현균 옮김 그대가 사랑하게 될 때, 아직 사랑에 빠진 적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가장 깊은 고통은 행복한 동시에 불행한 것임을 알게 되리라 당연한 귀결; 사랑은 빛과 그림자, 시와 산문의 심연, 그곳에선 동시에 울고 웃는 것이 가장 값진 것 최악은, 가장 끔찍한 것은, 사랑 없이는 삶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루벤 다리오(1867~1916년)는 니카라과의 메타파에서 내어났다. 니카라과에서 가장 사랑 받는 시인이다. 그는 19세기~20세기 초 라틴아메리카에서 전개된 혁신적인 문학운동인 모데로니모스를 주창한 시인이기도 했다. 그의 주창대로 그는 정지적 현실을 외면하고 순수 문학에 전념했다. 그는 문학에는 문학 외적인 목적이 일절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그는 강압에 못이겨 독재자를 칭송하는 시를 썼다. 그는 49세를 일기로 유년기를 보낸 레온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레온 대성당에 묻혔다. 「그대가 사랑하게 될 때....」는 사랑 예찬의 시다. 여기서의 사랑은 에로스적인 사랑만은 아니다. 화자는 말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깊은 고통은 사랑하기 때문에 겪어야 되는 행복과 불행이라고, 사랑
꿈의 고비 바오긴 락그와수렌/이안나 옮김 백양나무 그늘 아래 새끼 낙타가 울고 솥에 든 가축의 젖에 달이 뜬다 작은 산꼭대기로 구름이 흘러가고 꿈에 찾아오신 어머니의 모습이 생생하다 커다란 모래언덕과 하늘이 고비에 녹아 스러지고 암낙타의 하얀 코뚜레 소리가 새끼 낙타에게 와서 사라진다 동쪽 오아시스 갈대숲에 원앙이 꾸꾸 노래하고 여러 꿈속에서 늘 어머니가 찾아오신다 바오긴 락그와수렌은 몽골의 초원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는 한국을 네 번이나 방문한 지한파다. 1962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했지만 20년이 지난 1982년에 첫 시집 『서정의 궤도』가 출간 되면서 몽골을 대표하는 3대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 후 사회주의 사상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시집을 출간하지 못하다가 1991년에 『이중주』를, 2000년에 『쓴 풀』을 출간하게 된다. 그는 누군가와 똑같은 시를 쓴다면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선언한다. 그의 시에서는 초원의 바람소리가 들린다. 그의 시에서 어머니의 존재는 자연이며 생명의 원천이며 감수성의 원초적인 실마리라 할 수 있다. 「꿈의 고비」 역시 어머니가 전경을 이룬다. 각 연의 마지막 행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혈육의 어
묘비명 후안 헬만/성초림 옮김 새 한 마리 내 안에 살았다 꽃 한 송이 내 피를 떠돌았다 내 마음은 바이올린이었다 사랑했다, 사랑하지 않았다, 하지만 때로 나를 사랑해 주었다. 봄, 맞잡은 두 손, 행복함에 나도 즐거웠다. 내 말은 사람은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 새 한 마리 눕는다. 꽃 한 송이. 바이올린 하나.) 후안 헬만(1930-2014)은 아르헨티나 출신이다.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하다 중퇴하고 청년공산당에 가입한다. 호르헤 비델라가 1976년 쿠데타로 집권하기 1년 전, 그는 망명을 한다. 오랫동안 외국을 떠돌며 독재자를 비판하고 저항한다. 그의 아들과 며느리가 군사독재의 희생자가 되기도 했다. 임산부였던 며느리가 감옥에서 출산한 아기는 우루과이로 입양되었다. 아르헨티나에 민주정부가 들어섰지만 그는 멕시코에서 살다 생을 마감했다. 「묘비명」은 그 자신의 묘비명을 상정하고 쓴 시가 분명하다. 시인의 가슴에 살았던 새는 자유의 상징일 것고 군부독재에 의해 억압당하는 자유에의 기원이기도 할 것이다. 그의 피를 떠돌고 있었던 꽃 한 송이는 저항정신의 상징이다. 그의 마음이 바이올린이었으면 그는 운명적으로 시인일 수 밖에 없다. 어떤 글에서 바이올린은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 아담 자가예프스키/최성은 이지원 옮김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 위안이 있다, 타인의 음악에서만, 타인의 시에서만. 타인들에게만 구원이 있다. 고독이 아편처럼 달콤하다 해도, 타인은 지옥이 아니다, 꿈으로 깨끗이 씻긴 아침 그들의 이마를 바라보면, 나는 왜 어떤 단어를 쓸지 고민하는 것일까, 너라고 할지, 그라고 할지, 모든 그는 어떤 너의 백신자일 뿐인데, 그러나 그대신 서늘한 대화가 충실히 기다리고 있는 건 타인의 시에서뿐이다. 아담 자가예프스키는 1945년 6월 21일, 폴란드의 리비우, 지금의 우크라이나 영토가 된 르부프에서 태어났다. 2차 대전 이후 르부프가 소비에트로 넘어가자 자가예프스키 가족도 새로이 폴란드 영토가 된 실롱스크 자방의 탄광도시인 글리브채에 정착해서 살았다. 그가 영원한 정신적 이방인으로 살게 된 것은 이러한 유년의 기억 때문이다. 그는 자기 자신까지도 타인의 의식 속에 넣고 시를 썼다. 그는 억압 받는 자의 고독에 깊이 천착 한다. “나는 시가 내 국가가 아니라 나 자신의 감정, 의견, 기쁨, 슬픔으로부터 커가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은 그의 이와 같은 시정신이 잘 드
불안스레 숨 쉬는 나뭇잎으로 오쉬프 만델쉬탐/조주관 옮김 불안스레 숨 쉬는 나뭇잎으로 검은 바람은 살랑거리고 날고 있는 제비는 어두운 하늘에 원을 그린다 내 죽어가는 다정한 가슴으로 번져오는 황혼은 꺼져가는 빛과 조용히 다투고 있다 저녁 숲 위로 구리빛 달이 떠 있다 왜 음악이 없을까? 왜 그런 침묵만 흐를까? 오쉬프 만델스탐(1891-1938)은 바르샤바의 유태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1934년 5월 어느 날 밤, 그의 아파트에 비밀경찰들이 들이닥쳤다. 안나 아흐마토바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등의 시인들이 함께한 자리에서 낭송했던 스탈린을 풍자한 시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그의 두꺼운 손은 구더기처럼 기름기로 번들거리고/말은 저울추처럼 믿음직하며/바퀴벌레 같은 콧수염은 웃고 있으며 그의 장화목은 번쩍인다’는 시였다. 그는 그날 밤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우랄산맥의 소도시로 추방된다. 1938년 두 번째로 체포된 뒤 강제수용소로 보내진 그는 그해 12월 27일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의 작품은 부인 나데쥬다의 암기에 의해 복원된 것이 대부분이다. 암기되지 않은 것은 필사본으로 여러 지인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그의 시는 사랑과 두려움, 추억, 그리고 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