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벅스·모비딕 려원 커피잔 속 모비딕 슈핑크림 연애처럼 소용돌이쳐요 머리가 흰 수염 고래로 주세요 빨리 하얘지고 싶어요 출렁이는 언어는 이제 감당 못 해요 태평양을 건너는 동안 고래들은 얼마나 수다스러웠을까 연애를 마시는 동안 포경선 피쿼드호 대항하는 모비딕 스타가 될 수 없는 나는 흰고래 수염을 마셔요 려원은 2015년, 『시와 표현』으로 등단했다. 「스타벅스·모비딕」은 스타벅스에서 마시는 커피를 모티프로 쓰인 시로 읽힌다. 모비딕은 허먼 멜빌의 대표작이다. 우리나라에는 『백경』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었다. 인간과 고래의 사투를 그렸다. 시인의 상상력은 태평양과 고래와 포경선 피쿼드호에 이른다. 그러나 시인은 스타가 될 수 없다고 자탄한다. 상상인 시인선 009 『그해 내 몸은 바람꽃을 피웠다』 중에서. 김윤배/시인
무화과 이재무 술안주로 무화과를 먹다가 까닭 없이 울컥, 눈에 물이 고였다 꽃 없이 열매 맺히는 무화과 이 세상에는 꽃 시절도 없이 어른을 살아온 아들이 많다 이재무는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1983년에 시단에 나왔다. 「무화과」는 속꽃으로 열매를 맺는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꽃 없이 열매 맺는 과일로 보인다. 그 무화과를 먹다가 시인은 까닭 없이 울컥 눈에 눈물이 고인다. 아니다. 까닭이 없는 게 아니다. 세상에는 무화과와 같은 군상들이 얼마나 많은가. 꽃 시절 없이 어른으로 살아온 아들들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 아들들 속에 시인 자신도 있는 것이다. 시작시인선 409 『즐거운 소란』 중에서. 김윤배/시인
남겨진 사람들 심춘자 터널 속 어둠처럼 긴 현실 슬픔은 그날 그대로 어머니는 아들을 잃고 아내는 남편을 잃고 딸은 아버지를 잃고 삶이 무너졌다 아침엔 눈이 또 떠졌다 심춘자는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났다. 2018년 『문학사랑』신인상을 받으며 문단에 나왔다. 「남겨진 사람들」은 우리들의 일상의 삶에서 겪게 되는 비극적인 상황을 묘사한 시다. 슬픔은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더 선명해지는 것이어서 울컥울컥 피를 토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삶이 무너져도 아침엔 또 눈을 뜨는 것이다. 그게 가혹한 우리들의 삶이다.
설해 이수진 우리가 원망이 되더라도 우리가 잘 안 풀리는 문제로 남더라도 우리가 태양의 죽음을 살더라도 세상에 미로는 없는 거래요 격(格) 으로 들어와서 격(格)으로 나가는 거래요 잘못 들어선 길도 가다가 포기한 길로 모두 출격(출格)인 거래요 이수진은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2009년 『현대시』롤 문단에 나와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설해」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하는 시다. 원망되더라도, 잘 안 풀리는 문제로 남더라도 마침내, 태양의 죽음을 살더라도 세상을 격조 있게 살아야 하는 거라고 타이른다. 세상에 미로는 없는 거라고 깨우친다. 김윤배 시인은 충북 청주 출생으로 1986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했고, 현재 《용인문학》 편집고문입니다. 시집으로 『떠돌이의 노래』, 『바람의 등을 보았다』 『내 생애는 늘 고백이었다』 등 16권이 있습니다. 편집자 주
떨기나무 황학주 돌이 두두룩하게 밀고 올라온 땅의 울혈 위로 수도승의 외침 같은 떨기나무의 메마름이 꽂혀 있다 말라버린 웅덩이가 괴로운 짐승처럼 옆으로 가 누워서 눈을 감는다 황학주는 1954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1987년 시집 『사람』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CBS 기획조정실장을 역임했다. 「떨기나무」는 시인 자신의 은유로 읽힌다. 땅의 울혈 위로 밀고 올라온 떨기나무는 울혈의 대지에 서 있다는 것으로도 고통일 것이고 말라버린 웅덩이가 괴로운 짐승처럼 떨기나무 옆에 누워 눈을 감는 시인도 고통일 것이다.
흐르는 물을 붙들고서 노작 홍사용 시냇물이 흐르며 노래하기를 외로운 그림자 물에 뜬 마른 잎 나그네 근심이 끝이 없어서 빨래하는 처녀를 울리었도다 돌아서는 님의 손 잡아다리며 그러지 마셔요 갈 길은 육십리 철없는 이 눈이 물에 어리어 당신의 옷소매를 적시었어요 두고 가는 긴 시름 쥐어틀어서 여기도 내 고향 저기도 내 고향 젖으나 마르나 가느니 설움 혼자 울 오늘 밤도 머지 않구나 노작 홍사용(1900-1947)은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했다. 유년기는 화성 동탄의 돌모루에서 성장했다. 동탄 1기 신도시 옆 동산에 노작문학관이 있고 손택수 관장이 부임하면서 홍사용문학전집을 발간하고 체계 있게 운영하고 있다. 「흐르는 물을 붙들고서」는 민요풍의 연가다. 빨래하는 처녀를 울린 남자고 돌아서는 옷소매를 잡아다녀 물에 적신 여자고 혼자 울 오늘 밤이 시름인 연인이다. 즉물적인 요즘 세태와는 다른 연애다.
북천 유재영 그날 밤 산너머 그 산너머 석남꽃 피는 마을, 기러기 떼 물고 가는 청동빛 울음 소리에 내 전생도 무언가 궁금했는지 빼꼼히 창을 열고 내다보고 있었다 유재영은 1948년 충남 천안에서 출생했다. 1973년 박목월 시인에게 시를, 이태극 시인으로부터 시조를 추천받아 문단에 나왔다. 「북천」은 가을날의 시다. 기러기 떼가 북쪽 하늘로 날아가는 계절의 노래다. 석남꽃 피는 마을을 행해서 날아가는 기러기 떼는 청동빛 울음을 울며 날아가는 것이다. 그 다음이 비약이다. 시인은 창을 열고 빼꼼히 내다보았다. 마치 전생이 궁금한 것처럼. 동학사 간 『구름 농사』 중에서. 김윤배/시인
남겨진 사람들 심춘자 터널 속 어둠처럼 긴 현실 슬픔은 그날 그대로 어머니는 아들을 잃고 아내는 남편을 잃고 딸은 아버지를 잃고 삶이 무너졌다 아침엔 눈이 또 내렸다 심춘자는 강원도 삼척에서 출생했다. 2018년 『문학사랑』 신인작품상으로 문단에 나왔다. 「남겨진 사람들」은 아들을, 남편을, 혹은 아버지를 졸지에 잃고 남겨져 삶이 무너진 가족에 대한 노래다. 남겨진 가족들에게 삶은 터널 속 긴 슬픔 같은 나날이었을 것이다. 삶이 무너진 참혹한 현실은 나날이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을 것이다. 겨울은 길고 추운 밤을 건너면 또다시 눈이 내리는 아침이다. <천년의 시작> 간 『낭희라는 말 속에 푸른 슬픔이 들어 있다』중에서. 김윤배/시인
어느 날 30초 이수진 설산 고산 모두 일어나 바람의 혼돈에 물을 줄 때 우리를 지켜주던 산과 들의 잔별들 그리고 골목의 화초들 죽을 힘 다해 죽어가던 남국 우리는 꾸욱꾸욱 걸어 바다에 이르러서야 봇물처럼 하얗게 피어나는 밤하늘 볼 수 있었다 이수진은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2009년 『현대시』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어느 날 30초」는 시인의 상상력이 즐겁게 펼쳐진 시다. 산다는 것은 지극히 짧은 시간들의 연속이다. 그 짧은 초단위의 시간이 연속적으로 다가와 하루가 만들어지며 한 달이, 일 년이, 십 년이, 일생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수진 시인의 30초는 그녀의 일생에 닿는다. 그녀가 보려는 것은 하얗게 피어나는 밤하늘이다. 죽음의 하늘인 것이다. 하얀 밤하늘은 죽음의 상징으로서의 하늘이다. <여우난골> 간 『우리가 사과처럼 웃을 때』중에서. 김윤배/시인
제비집 - 동탄1 손택수 제비 한 쌍이 처마 아래서 한참 정지 비행중이다 빨랫줄이나 벽에 박아놓은 못에라도 잠시 앉으면 좋으련만 무슨 말 못할 사연이 있나 체념한 듯 돌아섰다가 다시 와선 또 가쁜 날갯짓 올려다보니 처마 깊숙이 마른 진흙자국이 있다 제비집이 붙어 있다 떨어진 자리 명절만 오면 헛걸음인 줄 알면서도 신도시로 바뀐 고향에 와서 옛 논과 들과 마을을 떠돌다가는 사람들이 있다 손택수는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호랑이 발자국』 『목련 전차』 『나무의 수사학』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붉은 빛이 여전 합니까』 등이 있다. 「제비집-동탄1」은 손택수의 근무처인 <노작 홍사용문학관>과 무관치 않다. 근무처가 동탄에 있는 것이다. 해마다 찾아와 처마 깊숙한 곳에 제비집을 짓는 한 쌍의 제비와 명절만 오면 신도시로 변해버린 고향 동탄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문학동네> 간 『어떤 슬픔은 함께 할 수 없다』중에서. 김윤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