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김경후 눈 먼 새들 열린다 날개 묶여 열린다 핏빛으로 떨어진다 열린 채 얼어붙은 채 엄마, 떨어지면 날아가? 가을 하늘은 멀고 높다 지하철역 스크린도어 열리고 닫힌다 내가 스마트폰을 찾는 사이 열차 날아갈 듯 핏빛 눈빛들 김경후(1971~)는 서울에서 태어나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열두 겹의 자정』『오르간, 파이프, 선인장』 등을 펴냈다. 그녀는 “우리는 살면서 울음을 참기를 강요당해 오히려 속 시원하게 울지 못할 때가 많다” 고 말한다. 이런 마음을 좀 더 섬세하게 다뤄보고 싶었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그녀는 “누구를 생각하며 시를 썼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너무 힘들어서 울지 못 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고 말하기도 한다. 「단풍」은 섬세하고 도시적인 시다. 붉게 단풍 든 낙엽들을 눈 먼 새로 보았다는 것이 시의 모티브일 것이다. 날개가 묶여 나무에 열린 낙엽들, 핏빛으로 얼어붙은 채 떨어지는데, 떨어지며 나무에게 묻는다. “나 떨어지면 날아가?” 낙엽이 날아가는 가을 하늘은 멀고 높다. 그리고 장면이 전환된다. 지하철 안에서 화자가 스마트폰을 찾는 사이 열차 안에는 날아갈 듯한 핏빛 눈빛들이
닫힌 문 너머에서 이혜미 곁을 비우며 멀어지는 손끝처럼 하나의 문장을 완성하고 그 문을 떠날 때 우글거리겠지, 썩고 마르고 흐르고 무뎌지겠지, 사그라들다 환해지겠지, 먼지를 품겠지 새로 지은 어둠을 선물하면 오래 닫아둔 문 뒤는 흑백이 우거지는 입체가 된다 약속이 저마다의 문이라면 모두가 열쇠를 내버리고 함몰하는 방들 겹겹의 미로 속에서 오랜 다짐이 무너진 뒤에야 짐작하지 닫힌 눈꺼풀이 몸의 가장 어두운 뒷면이었음을 이혜미(1988~)는 경기도 안양에서 출생했다. 그녀는 2006년, 최연소인 19세에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보라의 바깥』『뜻밖의 바닐라』 등이 있다. 이희섭 시인이 아버지고 정용화 시인이 어머니인 시인가족이다. 「닫힌 문 너머에서」는 죽음을 노래한 시로 읽힌다. 닫힌 문은 삶이 닫힌 문일 것이다. 하나의 문장을 완성했다면 일생을 끝냈다는 의미다. 묘지에 묻힌 사람 때문에 썩고 마르고 눈물 흐르다 무뎌질 것이다. 시신은 사그라들다 뼈가 환해질 것이며 먼지로 바뀔 것이다. 새로 지은 어둠은 결국 무덤일 것이고 무덤 속은 흑백이 우거진 지하 세계가 될 것이다. 약속이 문이라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아서 열쇠를 버려야 할 것이고 방들은
생각이 나서 윤지양 전화를 했다 오랜만에 걱정이 어른스럽게 말했다 너 문단에 아는 사람도 없어서 어떡하니 그러게 쓰고 싶은 대로 쓸 거라고 말할 수도 없고 말해도 들을 사람도 없고 사랑하는 것만 쓸 수도 없고 미워하는 것만 버릴 수도 없네 무엇을 담으면 넘치지 않을까 ......... 무엇을 담으면 부족하지 않을까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글쎄 고아도 자라면 어른이 된다니까 윤지양(1992~)은 대전에서 태어나 이대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했다. 201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나왔다. 그녀는 시적인 생각이나 이미지를 전달하는 데 효율적인 방법을 찾는 시인이다. 그 방법이 때론 그림이 되기도 하고 시행의 불규칙한 배치가 되기도 하고 주사위를 펼친 전개도가 되기도 하다. 그녀는 특히 ㅂ에 꽂혀 있다, ㅂ을 ㅁ의 흘러내림이라고 생각하는 그녀에게 ㅂ은 무한한 상상력을 주는 듯하다. 이번에 나온 그녀의 첫시집 『스키드』를 읽으면 느끼게 된다. 「생각이 나서」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나서 누군에겐가에서 걸려온 축하 겸 걱정의 전화가 모티브다. ‘너 문단에 아는 사람도 없어서 어떡하니’라는 말은 한국사회의 보편적인 정서다. 시단 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그렇다
가을밤 백낙천 서리는 희끗희끗 풀벌레소리 구슬퍼 길에는 사람의 발자취 끊겼구나 홀로이 문밖을 나 들녘을 바라보니 메밀꽃에 달이 밝아 눈이 오듯 하여라 백낙천(백거이 772-846)은 하남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당(盛唐) 시대의 이백과 두보와는 시대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중당(中唐) 시대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이백과 두보에 필적할만한 시인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36세에 한림학사가 되었다. 그는 이 때 이미 저 유명한 「장한가(長恨歌)」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네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장한가는 현종황제와 양귀비의 비련의 사랑을 노래한 작품이다. 도입부는 ‘임금은 꽃에 취해 나라까지 버릴려고/오래두고 찾았으나 진짜 꽃은 못 얻었지/양가네 집 여자 있어/깊고 깊은 규방에서 남모르게 피었나니/하늘이 준 아름다움과 그 향기는 못 버려 하루아침 임금에게 그 향기 날아갔네’ 그의 또 다른 불후의 시편은「비파행(琵琶行)」이다. 그가 좌천되어 강주사마로 있을 때 배 위에서 비파 타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녀는 본래 장안의 창녀였는데 색이 쇠하여 장사치의 아내가 되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사는 여자였다. 그는 술자리를 마련하고 그녀에게 비파를 타게 했다. 비파의 감동으로 그
처음 황주에 이르러 소동파 홀로 웃네, 평생에 입 때문에 바빴던 것을. 나이 먹어 하는 일이 도리어 황당만 하였으니, 성곽에 굽이치는 양자강 보니 고기맛 좋으리고. 아름다운 대나무밭, 산에 산에 이었으니 죽순 향기 좋으리라. 쫓겨 난 몸, 원외가 되든 어떻든. 시인은 예대로 수조랑*이 되었다네. 오직 부끄러움은, 아무 일에도 쓸모없이 되었어도. 아직 나라에서 술 짜는 자루 지급 중이라. * 소동파가 전에 이 관직에 있었음 소동파(1037-1101)는 사천성 출신이다. 22 세 때 과거험에서 진사로 합격하였는데 그때 과거시험 위원장이 구양수였다. 그는 구양수의 제자가 되었으며 구양수의 후원으로 문단에 나갔다. 다시 제과에 응시하여 장원이 되었고 산시성의 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관직 생활은 순탄치 않아 두 번의 유배를 겪었다. 그의 문학은 운명에 순종하기 보다는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인간상을 묘사하는데 힘썼다. 따라서 그의 시는 비애나 감상이 나타나지 않으며 오직 의욕에 찬 생활과 역동적인 사회와 개척적인 인간상이 주류를 이룬다. 그가 친구의 시평에서 ‘그대의 글은 마치 구름이 떠나고 물이 흘러가는 듯 처음부터 정해진 바탕이 없다. 그러나 언제고 가야할 곳으
산골의 가을저녁 왕유 비 개인 산 성큼 다가선 가을 밝은 달 소나무 사이에 비치고 맑은 물 돌 위를 흐른다 대나무숲 버석이더니 빨래터 아낙네 돌아오고 연잎 흔들리더니 고깃배 지나누나 흘러간 세월 따라 꽃들은 지고 없지만 풍류 즐기는 젊은이 이 곳에 머물러 봄직도 하이 왕유(699-759)는 산서성 출신으로 상서우승의 벼슬을 지냈다. 다른 시인들과는 다르게 고위관직을 지낸 그의 시에는 불교적 색체가 강해 시불(詩佛)이라고 불리는 대표적인 산수시인이다. 그는 당대의 대표적인 시인 이백과 두보와 대비된다. 이백처럼 능동적으로 낭만적 기질을 발휘하지도 않았고 두보처럼 정치적 현실이나 사회적 현상을 작품에 반영하지도 않았다. 그는 외부로 부터의 오는 모든 것들을 고즈넉하게 받아들여 이를 내성적으로 심화시켜나갔다. 이를 통해 자기응시와 인간적 고독을 다시 자연에 투사하는 방법으로 시세계를 밀고 갔다. 왕유의 시에 인간에 대한 원망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범용한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고뇌를 진지하고 솔직하게 표현한 시풍으로 독자들의 공감과 사랑을 얻고 있다. 그는 그림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남종화의 시조로도 일려져 있다. 「산골의 가을저녁」은 자
가을이여 5 한유 갈래 갈래 공연한 슬픔 걸고 슲고 슲게 빈 걱정 안고 있네. 이슬은 가을 나무 높이 맺히고 벌레는 찬 밤 긺이 슬퍼 우네. 삼가 물러나 새삼 조심하니 악착스레 앞서 날뛰던 일 구슬프네. 소박한데 돌아와서야 편안한 길 느끼고 옛 것을 길으니 긴 두레 줄 잡히네. 이름만 뜬 것 오히려 부끄럽고 세상 맛 엷은 것 정말 스스로 다행이네. 대저 부끄러움도 허물도 잊어버리면 이곳이 바로 은자의 집 되리라. 한유(768-824)는 허난성 난양 출신으로 사상가이며 시인이다. 그는 옛 문물을 숭상하는 상고주의자여서 전통적 윤리사상인 유교를 받들고 중국의 사회조직을 파괴한다고 생각되는 불교와 도교를 맹렬히 반대했다. 이는 그의 문학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옛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야말로 높은 문학정신이라고 생각했다.「가을이여」역시 그의 상고주의가 반영된 작품이다. 첫 연의 이슬과 벌레는 화자의 은유다. 높은 정신을 가졌으나 찬 밤이 길어 슬피 우는 것이다. 둘째 연은 관직에서 물러나 생각하니 악착스럽게 날뛰던 자신이 슬프고 물러나 소박하게 살아가니 마음이 고요해져서 옛 것을 긷는 긴 두레박줄이 잡히듯 학문이 보인다는 것이다. 셋째 연은 이름만 알려진 것이 부끄러울
꽃을 위한 서시 김춘수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나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에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김춘수(1922~2004)는 경남 충무에서 태어났다. 통영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학교를 거쳐 일본 니혼대학 예술과에 입학 했으나 3학년 때인 1942년 12월, 그는 겨울방학을 맞아 귀향길에 나섰다가 불경죄로 일경에게 체포된다. 요코하마헌병대와 세다가야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다가 7개월 뒤에야 귀국 조치된다. 이 사건으로 니혼대학에서 퇴학 처분을 당한다. 1946년에 조향, 김수돈 등과 시 동인지 '낭만파'를 펴내고‘조선청년문학가협회’경남본부에서 발행한 [해방 1주년 기념 사화집]에 시‘애가(哀歌)’등을 발표하면서 시인의 길에 나선다. 이듬해 자비출판으로 『구름과 장미』를 펴낸다. 김춘수는 꽃의 시인으로 알려졌다. 이때의 꽃은 의미를 불러들이는 형이상학적 존재다. 그러나 독자들은 그의 의도
돌각담 김종삼 다음부터 광막한 지대다. 기울기 시작했다 십자형의 칼이 바로 꽂혔다. 견고하고 자그마했다. 흰 옷포기가 포기어 놓였다. 돌담이 무너졌다 다시 쌓았다. 쌓았다 쌓았다 돌각담이 쌓이고 바람이 자고 틈을 타 동혼(凍昏)이 잦아들었다 김종삼(1921~1984)은 황해도 은율에서 출생했다. 김종문 시인이 형이다.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1938년 일본으로 건너가 토요시마상업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도쿄문화학원 문학부에 입학하지만, 작곡을 하고 싶어 음악공부를 했다. 그가 고전음악 마니아가 된 것은 젊은 날의 꿈과 관련이 깊을 것이다. 사변 전의 유명한 고전음악 감상실이었던 명동의 돌체, 오아시스의 단골이었다. 전쟁이 터지고 돌체가 피난지 부산 역전으로 옮겨진 뒤에도 그곳을 단골로 드나들었다. 돌체는 피난지 부산으로 몰려든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 그는 때로 잠 잘 곳이 마땅치 않아 돌체의 홀에서 자기도 했다. 6.25 전란 중이던 1951년『현대예술』에「돌각담」을 발표 하며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알콜릭이어서 심지어 소주를 훔쳐 마시기도 했다. 수모와 모욕으로 가득 찬 현실의 생활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신성하고 가장 평화로운 것을 추
사랑 김수영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김수영(1921~1968)은 서울 관철동에서 출생했다. 선린상고를 졸업한 후 일본에 건너가 1941년 동경상대 전문부에 입학했으나 1943년 학병징집을 피해 귀국했다. 이듬해 만주 길림성으로 이주해 길림 제육고 교원으로 일했다. 광복이 되자 귀국해서 연희대 영문과 4학년에 편입했으나 중퇴했다. 1945년『예술부락』에「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며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1949년에는 김경린, 박인환 등과 합동시집『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여 모더니스트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소시민적 비애와 슬픔을 모더니즘적인 감각으로 펼치다가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현실에 대한 비판과 민중의 삶을 깊이 있게 성찰하는 참여시로 바뀐다. 김수영은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이 회통하는 자리에 시의 세계를 완성하고 있다. 「사랑」의 화자는 너로 인해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운다. 그러나 너의 얼굴은 불빛이 켜지는 찰나에 꺼졌다